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트 폰 랑케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795년 [[작센 왕국|작센 선제후국]]의 [[루터교회]] 가문에서 태어났다. [[라이프치히 대학교]]에서 역사학과 고전학을 전공한 이후 김나지움 교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진행하였고, 이러한 연구 성과는 1824년 출판된 <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, 1494~1514>(Geschichte der romaenischen und germanschen Voelker von 1494 bis 1514)로 이어진다. 내용[* 간략히 요약하자면 게르만족의 대이동, [[십자군 전쟁]] 등을 통하여 어떻게 유럽이 중세 이후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되는지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.]보다도 서문의 ''''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(Wie es eigentlich gewesen) 사실을 다루고자 했다.''''라는 글귀가 역사학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고, 프로이센의 [[높으신 분]]까지도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랑케는 1825년 [[베를린 대학교]] 역사학과의 정교수로 발탁된다. 정치적으로 보수성향이었던 랑케는 이 시기 [[자유주의]]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[* 물론 당연히 [[프랑스 혁명]]도 미친듯이 깠다.] [[메테르니히]]를 비롯한 [[독일 연방]] 보수계의 거물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러한 친분은 이후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. [* 그렇다고 랑케가 어용학자였던건 아니다. 오히려 권력층이 그의 능력과 명성에 감화되었다.] 특히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[[베네치아]]의 문서보관소를 개방해주는 파격적인 특혜를 주기도 했다. 내친김에 메테르니히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[[교황령]]의 문서보관소까지 열람해 보려고 했지만 [[프로테스탄트]]였던지라 단박에 거절당했다. 그리고 이때의 앙금이 남았는지, 나중에 [[종교개혁]] 시기 교황들의 행적을 다룬 저서에서 자신에게 보관소 열람을 거절한 [[교황청]]을 잘근잘근 씹어준다. 이후로도 랑케는 [[유럽사]]에 대한 방대한 저서들을 저술했고,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41년 [[호엔촐레른]] 왕실의 공식 역사가로 지명되는 한편 1865년에는 귀족 작위를 추서받아 성 앞에 Von을 붙이는 것이 허락된다. 70대 이후로는 점차 건강이 악화돼서 급기야 한쪽 눈이 멀었지만 역사에 관한 그의 열정은 식지않았고, 85세였던 1880년에는 [[세계사]] 전체를 다루는 저서 집필에 착수한다. 하지만 이미 나이가 나이였던지라 집필 작업은 [[12세기]] 무렵까지를 다룬 6권 정도에서 중단되었고, 1886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.[* 사후 그의 제자들이 랑케가 남긴 미완성 원고들을 모아 15세기까지의 역사를 출판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